헌 책의 두 번째 생명, 예술로 피어나다
누군가에게는 더 이상 읽히지 않는 헌 책 한 권. 하지만 예술가의 손에 들어가면 페이지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조각이 된다. 책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책장을 오려내고 접고, 말고, 조각하는 과정을 거치면 시각적인 이야기까지 전해주는 입체 예술작품이 된다. 종이라는 평면의 재질이 고정관념을 넘어설 때,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아트 오브제를 마주하게 된다.
헌 책으로 만든 아트 오브제는 단순히 ‘재활용’에 머물지 않는다. 이 작업은 책의 내용을 물성화하고, 과거의 감정을 현재의 형태로 끌어올리는 예술적 행위다. 페이지는 더 이상 문장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닌, 형태와 구조, 그리고 공간을 구성하는 재료가 된다. 낡은 페이지 위로 새로운 생명과 감정이 얹히는 순간, 책은 다시 살아난다. 이번 글에서는 헌 책을 활용한 아트 오브제의 주요 기법들과 제작 과정, 그리고 일상 인테리어로서의 활용법까지 살펴본다.
종이를 말고 접고 오려서 만드는 입체 조각 기법
책 오브제의 가장 기본적인 기법은 페이지를 ‘접기(Folding)’부터 시작된다. 이 방식은 별도의 도구 없이도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조형 방법이다. 예를 들어, 삼각형 또는 곡선형으로 각 페이지를 일정한 각도로 접으면 전체적으로 원형 또는 웨이브 형태의 입체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면 꽃병, 나무, 동물의 형태처럼 자연물을 형상화한 구조물을 손쉽게 만들 수 있다.
좀 더 고급 기법으로 들어가면, ‘컷 아웃(Cut-out)’ 방식이 있다. 이는 책 속 페이지를 하나씩 오려내면서 입체감을 주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책 속에 숲을 오려낸다면, 앞쪽 페이지에는 나무의 앞면을, 뒷쪽에는 배경을 구성하여 마치 책 안에 숲이 펼쳐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레이어(layer)를 활용한 깊이 표현 방식으로, 작은 극장 무대처럼 감상자에게 몰입감을 제공한다.
또 하나는 ‘말기(Rolling)’ 기법이다. 페이지를 가늘게 말아 한쪽을 뾰족하게 하거나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고 이를 조합하여 구조체를 만든다. 이를 통해 꽃잎, 뿔, 새의 깃털 등 세밀한 표현이 가능하다. 특히 책 페이지의 가장자리 부분에 남은 문장이 자연스레 작품에 들어가면, 오브제에 내러티브가 부여되어 더욱 흥미로운 작품이 된다.
이러한 기법들은 단순한 공예를 넘어서 예술과 조형 감각이 결합된 작업으로, 실제로 많은 업사이클링 아트 작가들이 책을 기반으로 다양한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나만의 스토리 담긴 오브제 만들기 – 제작기
책 오브제를 제작할 때 가장 먼저 고민할 것은 “어떤 책으로 작업할 것인가”다. 소설, 백과사전, 시집, 혹은 낡은 악보집 등, 책이 담고 있는 텍스트의 분위기와 책 자체의 두께, 재질 등이 작품의 성격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래된 백과사전은 두께가 있어 조형적으로 안정된 구조를 만들기 좋고, 시집은 얇고 부드러워 섬세한 곡선형 작업에 적합하다.
필자의 경우, 낡은 문학 작품집 한 권을 골라 조형 작업을 시작했다.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며 각각을 반으로 접고, 반쯤 접은 페이지마다 곡선 형태를 만들었다. 이 곡선들이 겹쳐지며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웨이브 형태는 마치 종이로 만든 파도 같았다. 중앙에는 일부 페이지를 세로로 잘라 조형 중심축으로 세우고, 양옆에는 말린 종이 조각들을 덧붙였다. 약 2시간의 집중 끝에 마치 ‘문학의 흐름’을 형상화한 듯한 오브제가 완성됐다.
작품을 완성한 후, 가장 뿌듯한 순간은 단순히 형태의 완성감이 아니라,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이건 무슨 책이었어요?”라고 묻는 순간이다. 헌 책의 내용과 형태가 연결되면서, 그 안에 담긴 메시지까지 함께 전달될 때, 그것은 단순한 재활용이 아니라 감정과 시간의 재해석이 된다.
인테리어 오브제로 활용하는 팁과 전시 아이디어
헌 책 오브제는 단지 책장 위에 올려두는 소품에 그치지 않는다. 적절히 연출하면 공간의 분위기를 바꾸는 독창적인 인테리어 소품이 된다. 예를 들어, ‘페이지 플라워’ 형태로 만든 작품은 벽에 부착하면 마치 종이꽃이 피어난 듯한 시각적 효과를 준다. 또는 책을 펼쳐 수직으로 세운 뒤 내부에 작은 조명(LED 티라이트)을 넣으면,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종이 조명 오브제’가 된다.
더 나아가 작은 전시 공간을 마련해 헌 책 아트 오브제를 전시하는 것도 추천한다. 커피 테이블 위나 책장 한 칸을 작은 갤러리로 바꿔보자. 각각의 작품 옆에는 사용한 책 제목과 제작 날짜, 느낀 점 등을 적은 작은 태그를 붙이면 관람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미니 전시처럼 보인다.
또한 책 오브제를 활용해 선물하기도 좋은데, 예를 들어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을 접고 말아 만든 오브제를 선물하면, 책이 전하는 감정과 손으로 만든 정성이 함께 전달된다. 이처럼 책은 한 번 더 누군가의 삶에 스며들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
마무리하며 – 버려진 페이지 속 또 다른 이야기
헌 책은 낡고 닳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수많은 감정과 문장이 살아있다. 그것을 예술로 다시 불러내는 작업은 단순히 재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재구성하고 감정을 형상화하는 작업이다. 종이라는 익숙한 재료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물건의 가치와 시간의 의미를 돌아보게 된다. 오늘, 책장 구석에 잠든 책 한 권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